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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2018 Mar. 이인직 '혈의누' 관련

Zoe_0911 2019. 5. 2. 15:57


친일 소설인 '혈의 누'가 당대에 성공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

글쓴이: 이경림. 서울대한국어문학연구소 연구원. plumkr@daum.net

- 근대 이전 소설 독자의 취향을 요약하면 '반복의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독창성이나 예술성이 셀링 포인트인 요즘 소설과 달리 고전소설의 셀링 포인트는 '비슷한 이야기를 조금씩 비틀어 반복하는' 데 있다. 반역자와 외적에 맞서는 영웅, 가정 내의 음습한 모함*모략,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아니면 끝내 이뤄지는 사랑... 겉은 달라도 속은 비슷한 이 이야기들 속에서 독자는 '착하면 복을 받고 악하면 벌을 받는다' '간절하면 하늘이 돕든다'같은 '생각'들을 재확인하고 안심한다. 이처럼 사회구조의 어떤 불변성이 만들어낸 보편성에 힘입어 오늘날의 독자들도 고전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00년대에는 ...(중략) 그 격변의 한복파넹 있는 대중이 오래된 이야기의 반복과 변주가 제공하는 안심에 안주할 리가 없다. 이 시대는 사람드르이 미래가 갑자기 오리무중이 돼버린 최초의 시대였다. 조선 시대에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미래엔 백정이 될 터였고, 양반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미래엔 양반이 될 터였다. 그런데 지금은?


(중략)

옥련의 이야기는 미지의 미래에 대한 대중의 불안과 기대 같은 근대 고유의 감수성을 직격한 것이다. 누군가의 딸*아내*어머니라는 전통작 여성의 미래를 단번에 깨뜨린 옥련은 '미지의 미래'라는 개념 그 자체를 소설로 옮긴 듯한 인물이다. 옥련은 옛날이야기의 여성들처럼 사랑에 빠지지도 않고, 무고한 모함에 희생되지도 않는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라모가 맺어진다거나 누명을 벗는다거나 하는 익숙한 미래를 상상할 수가 없다. 옥련은 계속해서 독자는 물론 저 자신도 모르는 ㄴㅊ선 세계로 자꾸 이동할 뿐이다. (중략) 독자들에게 옥련은 기대와 긴장을 동시에 안겨주는 존재다. 그 때문에 독자들은 옥련이 잘되기를 바라면서 독자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풀릴지 모르는 미래로 나아가는 옥련의 뒤를 쫓아간다. '반복'에 익숙한 독자가 앞질러 갈 수 없는 이야기, '새로운 소설'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중략)

앞날을 알 수 없다는 불안은 예정된 미래보다 더 나은 삶이 가능하다는 기대와 붙어 다닌다. 불안과 기대의 공존은 모든 것이 예정돼 있던 세계에서 뜯겨 나와 갑자기 근대 사회에 던져진 대중을 특징짓는 새로운 감수성이었다. 여기에 뿌리를 박은 옥련의 이야기는 저자가 심어놓은 주제와 때때로 부합하고 때로는 부로하하면서, 또는 주제를 저 멀리 밀어내면서 팔렸다. 미지의 미래로 나아가는 옥련에게 보낸 독자의 사랑은 기실 옥련과 마찬가지로 '근대사회'라는 데서 제자리를 찾으려 방황하는 독자 자신에게 보내는 사랑이나 다름없었다.


(중략)

낯선 것을 즐기고 배우고 참여하려는 근대적 욕망은 미지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기대라는 심층의 감수성에서 갈라져 나온 자류다. [혈의누]의 흥행은 우리에게 표변하는 욕망이 아니라 욕망 자체를 밀어내는 심층의 근원을 찾아보라고 알려준다.